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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로 보는 윤리학, 전쟁 후 PTSD와 크세니아

by 예몬드 2026. 8. 19.

영화 오디세이 포스터

 

서론

1990년대생에게 홍은영 작가가 그린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몰아 화려하게 그려내 어린이 시절을 매료시킨 특별한 추억의 작품입니다. 저 역시 초등학생 때 매번 흥미롭게 읽었으며, 다음 권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때마다 친구들끼리 돌려 읽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필자가 학부시절 역사교육을 복수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는 20권 완결로 되어 있는데, 그중 18권에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드디어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내용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18권 이후 19권이 나오기까지의 텀은 꽤 길었는데, 기다림 끝에 발간된 19권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을 만화 속으로 빠져들게 한 일등공신인 아름다운 그림체가 전혀 생뚱맞은 그림체로 바뀌어있었기 때문이죠.

 

나중에서야 홍은영 작가와 출판사 사이에 저작권료로 인한 소송이 벌어졌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은영 작가와 사이가 틀어진 출판사는 다른 그림 작가를 섭외해서 스토리의 마무리를 지었고요. 아마 10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은 좌절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책을 읽을 마음이 뚝 떨어져 이후 19권과 20권은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경험을 한 대다수 또래들은 오디세우스가 제대로 고향에 돌아갔는지 어쨌는지 그 결론은 미완의 얘기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년이 지나고서야 이 영화를 통해 오디세우스 서사의 마침표를 직접 목도하며,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았던 어린 시절의 상상력과 추억을 비로소 완결 짓는 특별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래퍼가 음유시인이 되는 이유 — 구전 정형시의 현대적 계승

일반적으로 그리스 서사시 하면 고풍스러운 낭독이나 오케스트라 반주가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학부에서 역사교육을 복수 전공하며 호메로스를 접했을 때 그런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오디세이아』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스크린에 펼쳐 보입니다. 그 역할을 맡은 건 래퍼 트래비스 스캇입니다. 학계에서는 『오디세이아』가 '구전 정형시(Oral Formulaic Poetry)'의 방식으로 전승됐다고 봅니다. 여기서 구전 정형시란, 정해진 운율 공식과 반복 구문을 활용해 이야기꾼이 즉흥적으로 시를 엮어 청중에게 전달하던 방식입니다. 문자가 없던 시대에 기억과 리듬이 곧 저장 매체였던 셈이죠.

 

감독이 트래비스 스캇을 캐스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에 구전 정형시의 전통을 가장 생생하게 이어받은 예술 형식이 바로 랩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라임과 반복 훅, 즉흥 플로우가 수천 년 전 음유시인의 방식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트래비스 스캇의 목소리가 깔리는 순간 이야기가 박물관 유리 너머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거칠고, 날것이고, 조금은 불경스럽기까지 한 그 에너지가 오히려 고대 서사시의 본래 온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연꽃과 칼립소 사이 — 전쟁 후 PTSD의 은유

이 영화의 원작인 『오디세이아』에는 연꽃(Lotus)을 먹고 귀향 의지를 잃는 에피소드와, 님프 칼립소의 섬에서 7년을 보내는 장면이 따로따로 등장합니다. 영화는 이 두 사건을 하나로 합칩니다. 칼립소가 전쟁의 기억으로 망가진 오디세우스에게 연꽃을 먹여 트라우마를 잠재운다는 설정입니다. 처음엔 원작과 달라서 낯설었는데, 보면 볼수록 이 재구성이 훨씬 설득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연꽃은 단순한 망각의 열매가 아닙니다. 영화는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억누르기 위한 진정제로 읽어냅니다. PTSD란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의 사건을 경험한 뒤 반복적인 악몽, 감정 마비, 과각성 상태가 지속되는 심리적 외상 반응입니다.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 제작 당시 참전 용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시각, 즉 전쟁이 인간을 서서히 짐승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이 장면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간 구조도 달라집니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의 귀향 여정 대부분은 악몽 같은 과거 회상으로 처리됩니다. 이 서사적 선택은 오디세우스의 죄책감과 칼립소의 조종 능력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전쟁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그 기억을 지우고 싶은 욕망이 어떻게 한 사람을 섬에 붙들어 놓는지를 현대 심리학적 언어로 번역한 셈입니다. 제 경험상,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때 가장 실패하기 쉬운 지점이 "갖다 붙이기"인데, 이 장면은 그 함정을 피하고 있습니다. 원작의 구조를 허물지 않으면서 새로운 의미층을 쌓아 올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신의 뜻이 아닌 아가멤논의 정치적 공포 조성 수단으로 묘사한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희생의 힘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드는 대가에 있다"는 대사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희생 의례의 본질을 짚어냅니다. 인류학에서 희생 의례란 공동체가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해 치르는 상징적 행위로, 그 비용이 클수록 구성원에게 미치는 심리적 구속력도 강해집니다. 이 대사 하나로 고대 전쟁의 집단 심리가 얼마나 잔인한 논리 위에 세워졌는지가 선명해집니다.

 

트로이 목마가 가장 나쁜 이유 — 크세니아와 도덕적 심판

일반적으로 트로이 목마는 오디세우스의 기지와 용기를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역시 어릴 때 그 장면을 읽으며 "역시 영웅은 다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반대의 시선을 들이댑니다.

 

영화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크세니아(Xenia)'입니다. 크세니아란 고대 그리스의 환대 원칙으로, 낯선 이방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그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신성한 의무입니다. 제우스가 수호하는 이 법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현대인 눈에는 그냥 예절처럼 보일 수 있지만, 문자도 여권도 없던 청동기 시대에는 타인의 환대 없이 여행자가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타인의 환대에 목숨을 맡겨야 하는 현실에서 크세니아는 문명 자체를 지탱하는 근간이었습니다. 크세니아는 문명의 안전망 그 자체였고, 그래서 이를 어기는 행위는 단순한 결례가 아니라 문명 파괴에 가까운 중범죄였습니다.

 

영화는 오디세우스를 이 크세니아를 가장 심각하게 위반한 인물로 그립니다. 트로이 목마는 단순한 전술이 아닙니다. 상대 문명의 종교적 믿음, 즉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성 안으로 들이는 신성한 의례를 역으로 이용해 그 문명을 파멸로 이끈 행위입니다. 환대와 신뢰의 원칙을 정확히 무기로 삼은 것이죠. 이보다 크세니아를 노골적으로 짓밟은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영화는 '바다 민족(Sea Peoples)'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영화는 크세니아를 어긴 그리스인들 자체가 곧 문명을 파괴하는 바다 민족이 됐다는 암시를 건넵니다. 트로이의 몰락과 그리스 문명의 붕괴가 같은 도덕적 고리 위에 얽혀 있다는 해석입니다.

 

결론


초등학생 때 읽다 멈춘 이야기의 결말을 20년 뒤 영화관에서 맞이하는 경험은 꽤 묘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말이 영웅의 귀환이 아닌, 한 인간이 자신의 죄목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끝난다는 사실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즉 타인을 향한 환대와 신뢰의 원칙이 무너질 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가는 청동기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익명 뒤에 숨어 상대를 허물고, 환대 대신 불신을 기본값으로 삼는 지금 이 시대와 맞닿아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BBteaP8dHc&t=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