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호메로스는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작가입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서구에서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문학 작품이자 그리스 문화의 원형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문학 작품과 드라마, 영화의 틀이 바로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학문으로서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유튜브 영상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현대적 콘텐츠는 고전 작품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학술적인 텍스트로만 접할 때는 복잡한 신들의 이름과 방대한 세계관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기 쉽지만, 시각 자료나 요약 해설을 통해 접하면 왜 이 이야기들이 몇 천 년 동안 사랑받아 왔는지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즘 인기 있는 영화 오디세이를 보기 전 알아두면 좋을 사전 지식들을 일리아스와 트로이 전쟁을 활용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황금 사과 하나가 세계대전을 만든 방식
트로이 전쟁이 '미인 때문에 난 전쟁'이라는 말, 어디서든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요? 만화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접했던 저는 그 당시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입니다. 제우스와 포세이돈 모두 테티스를 흠모했지만, 예언자 프로메테우스가 "테티스의 아들은 아버지를 능가할 것"이라는 신탁을 전하자 제우스는 그녀를 인간 영웅 펠레우스와 강제로 결혼시킵니다. 여기서 '신탁(oracle)'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계시 혹은 예언을 뜻하며,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개인의 운명은 물론 국가의 전쟁 결정까지 좌우할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습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아킬레우스입니다.
문제는 결혼식에서 터졌습니다.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가 연회장에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긴 황금 사과를 던진 것입니다. 에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불화와 분쟁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이름 자체가 '다툼'을 의미합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각자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다투자 제우스는 골치 아픈 판정을 인간 파리스에게 떠넘깁니다. 신들이 인간을 이용해 갈등을 해소하려 했다는 점, 지금 생각해도 참 씁쓸합니다.
세 여신은 파리스에게 각각 다른 것을 제안합니다. 헤라는 세상을 지배할 힘인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무패의 전사가 되어 전쟁에서 승리할 능력을,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의 결혼을 제안했습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제안을 선택했고, 이 선택이 트로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뇌관이 됩니다.
즉, 트로이 전쟁의 씨앗은 헬레네가 아닌 신들의 불화와 황금 사과, 그리고 파리스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리스의 심판, 그리고 헬레네라는 명분
파리스는 태어날 때부터 '트로이를 멸망시킬 자'라는 신탁을 받아 산에 버려진 왕자였습니다. 양치기 손에 길러지다가 성인이 된 뒤에야 트로이 왕자 신분을 되찾은 인물입니다. 이 배경을 알고 나면 파리스의 선택이 단순한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했던 자가 가장 화려한 것을 택한 것,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프로디테의 가호 아래 파리스는 스파르타를 방문해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트로이로 데려갑니다. 여기서 헬레네는 단순한 아름다운 여인이 아닙니다. 헬레네는 그리스 전역의 영웅들이 구혼했던 여인으로, 결혼 전 구혼자들 모두가 "헬레네를 빼앗아 가는 자를 함께 응징하겠다"는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 맹약을 '틴다레오스의 서약'이라 부르며, 이것이 전쟁의 법적 근거가 됩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그리스 전역의 왕들에게 맹약 이행을 요구합니다. 그 결과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등 당대 최고의 영웅들이 트로이를 향해 집결했습니다. 이것은 트로이 전쟁이 '미인 전쟁'이 아니라 사실상 '맹약 이행 전쟁', 즉 국제 조약의 문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레네는 이유가 아니라 명분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헬레네 역에 루피타 뇽오를 캐스팅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저는 그 논란 자체가 이 이야기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감독이 보여주려 한 것은 여인의 외모가 아니라, 한 여인을 핑계 삼아 폭발한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었을 테니까요.
즉 헬레네는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 명분이었으며, 진짜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맹약과 인간의 탐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들의 대리전, 아킬레우스의 분노
트로이 전쟁은 인간들만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신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대리전을 벌인 구조, 이것이 일리아스를 단순한 전쟁 서사가 아닌 신화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그리스 측에는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헤파이스토스가, 트로이 측에는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레스가 힘을 실어줬습니다.
특히 아폴론은 트로이의 수호신에 가까운 존재였는데,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의 딸을 돌려주지 않자 아폴론은 그리스 진영 전체에 역병을 내립니다. 여기서 역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적 사고에서 역병은 신의 징벌, 즉 '신성한 응보(divine retribution)'로 해석됩니다. 쉽게 말해 신이 "네가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라"라고 직접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이 위기를 공개적으로 지적한 아킬레우스에게 아가멤논은 앙갚음으로 그의 전리품 여인 브리세이스를 빼앗습니다. 명예(τιμή, 티메)를 생명처럼 여기던 아킬레우스에게 이것은 단순한 재산 손실이 아니라 전사로서의 존엄 자체를 짓밟힌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티메'란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현대의 자존심보다 훨씬 강력한 사회적 구속력을 가진 가치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어머니 테티스에게 제우스가 그리스 군을 패배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제 경험상 이 장면이야말로 일리아스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입니다. 최고의 전사가 어머니에게 달려가 울며 부탁하는 모습, 수천 년 전 이야기인데 묘하게 공감이 됩니다.
아킬레우스가 빠진 그리스 군은 트로이의 최강 전사 헥토르에게 밀리기 시작합니다. 아킬레우스의 절친(혹은 사촌) 파트로클로스는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 전장에 나섰다가 헥토르의 손에 전사합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마침내 전장으로 돌아왔고, 헥토르와의 일기토 끝에 그를 쓰러뜨립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묶어 끌고 다니며 능욕했고, 이 잔혹함은 이후 그리스 군 전체가 저지를 만행의 예고편이 됩니다.
목마 작전, 그리고 오디세이아로 이어지는 이유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트로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10년에 걸친 공성전 끝에 트로이를 함락시킨 것은 무력이 아니라 오디세우스의 계략이었습니다. 바로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 작전입니다. 이 용어는 오늘날 컴퓨터 보안 분야에서도 쓰이는데, 악성 소프트웨어가 정상 프로그램으로 위장해 내부에 침투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원전에서 비롯된 개념이 2,700년 뒤에도 현역으로 쓰인다는 것, 호메로스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합니다(출처: Encyclopædia Britannica).
트로이의 예언자 라오콘은 목마를 성 안에 들이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포세이돈이 바다뱀을 보내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을 죽여버립니다. 트로이 군은 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날 밤 연회가 한창일 때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결사대가 성문을 열었고, 트로이는 허무하게 멸망했습니다.
승리한 그리스 군은 그 이후 걷잡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트로이의 예언자 카산드라 공주를 신전에서 능욕하고, 프리아모스 왕을 제단 앞에서 살해하고, 헥토르의 어린 아들마저 성벽에서 던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전쟁 범죄가 아니라 신성한 장소와 제의를 짓밟는 신성모독(sacrilege)이었습니다. 신성모독이란 신이나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장소를 모욕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말하며,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이는 신들의 분노를 직접 유발하는 가장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다고 느꼈던 부분은, 신들의 분노가 트로이 편 신들에게서만 나온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를 도왔던 아테나, 헤라마저 자국 편 군인들의 오만함에 등을 돌렸습니다. 승리한 자들이 오히려 신들의 응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귀향길에 겪는 온갖 재앙이 바로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됩니다. 출처: Perseus Digital Library — 호메로스
결론
트로이 전쟁은 아름다운 여인 때문에 난 전쟁이 아닙니다. 황금 사과 하나로 신들의 갈등이 인간에게 전이되고, 맹약과 명예와 탐욕이 뒤엉켜 10년 전쟁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긴 자들이 오만함 때문에 귀향길에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이야기가 오디세이아입니다.
놀란 감독이 영화 오디세이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헬레네의 외모가 아니라, 그 여인을 구실 삼아 폭발한 인간의 욕망과 권력 다툼입니다. 저는 캐스팅 논란 자체가 오히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체험하게 해주는 장치가 됐다고 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앞두고 있다면, 이 글에서 정리한 흐름 정도만 머릿속에 담아두셔도 영화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배우의 외모가 아닌 이야기의 구조에 집중한다면, 캐스팅 논란으로 이 영화를 외면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