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론
화려한 꿈이나 집단의 거창한 명분에 이끌려 살다가 문득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거운 굴레였는지를 깨달았던 순간이 있습니다. 한때는 명문대 진학이나 대기업 입사, 혹은 남들에게 인정받는 완벽한 삶이라는 '무거운 목표'만이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과 규범에 저를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가치들이 사실은 남들의 시선에 불과하며 나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소설 속 사비나가 경멸했던 '키치', 즉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와 집단이 강요하는 숭고함에 갇혀 진정한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았던 셈입니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무거운 삶의 중력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의 내면이 원하는 가벼운 선택을 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삶은 한 번뿐이기에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 비교하거나 증명할 수 없으며, 타인이 정해놓은 거창한 의미에 얽매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나만의 진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바로 그 순간을 정확하게 건드립니다. 가벼움과 무거움, 자유와 굴레 사이에서 길을 잃은 네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조용하지만 강하게 던집니다.
사비나가 경멸한 것, '키치'란 무엇인가
소설 속 화가 사비나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이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깊은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자유분방한 예술가 정도로 읽혔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 소설의 핵심 개념 하나가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키치(Kitsch)'입니다.
키치란 원래 저급한 모조품 예술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쿤데라는 이 개념을 훨씬 넓게 씁니다. 여기서 키치란 존재의 어두운 면, 즉 실수, 추함, 불완전함, 인간이 누구나 지닌 '똥' 같은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직 아름답고 숭고한 것만을 인정하려는 미학적·정치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이 원래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적인 믿음이 키치의 본질입니다.
사비나의 아버지는 완고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자란 사회는 피카소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했습니다. 그 경험이 그녀를 '집단이 강요하는 숭고함'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회사 생활 중 팀 전체가 하나의 비전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달려갈 때, 그 분위기에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지던 순간들이요. 거기서 제가 느낀 불편함이 정확히 키치의 압력이었다는 걸, 이 소설을 읽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쿤데라는 키치가 단순히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전체주의의 토양이 된다고 봤습니다. 다양한 사조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키치의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하나의 이념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면 '대변의 전체주의 키치 왕국'이 된다는 표현은 읽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합니다. 전체주의(Totalitarianism)란 국가나 이념이 개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려는 정치 체제를 말하는데, 쿤데라는 키치가 바로 그 전체주의의 미학적 얼굴이라고 본 겁니다.
존재론적 가벼움, 자유인가 허무인가
사비나가 추구하는 것을 '존재론적 가벼움(Ontological Lightness)'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존재론적 가벼움이란 특정한 가치, 의무, 집단의 기대에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배반하며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뜻합니다. 그녀에게 '배반'은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 원칙에 가깝습니다.
반면 프란츠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명망 있는 학자인 그는 인류의 전진, 정의, 우정, 행복을 믿으며 이를 '대장(The Great March)'이라 부릅니다. 그는 캄보디아 대학살에 항의하는 인도주의적 행진에 참여할 만큼 진지한 사람입니다. 사비나의 눈에 이 태도는 '정치적 키치', 즉 숭고한 명분에 도취된 또 다른 형태의 집단적 강박으로 보입니다.
저는 한때 프란츠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거창한 명분과 집단의 목표에 기꺼이 제 에너지를 바쳤고,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진이 끝나고 나면 남는 것이 의외로 공허하다는 걸 제가 직접 경험해 봤습니다. 프란츠가 강도에게 습격당한 뒤 사랑하지 않는 아내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쓸쓸하게 읽혔습니다.
그렇다고 사비나처럼 모든 무게를 던져버리는 가벼움이 답이냐면, 그것도 완전한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쿤데라 본인도 가벼움과 무거움 중 하나를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두 극단 사이에서 독자 스스로 자기 삶의 좌표를 찾아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삶은 단 한 번뿐이고, 다른 선택지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 옳았는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게 쿤데라가 던지는 핵심 명제입니다(출처: Britannica, Milan Kundera).
카레닌의 죽음이 말하는 인류의 근본적 실패
소설의 마지막 장 '카레닌의 미소'는, 처음 읽을 때 왜 갑자기 개 이야기로 끝나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이야말로 쿤데라가 가장 조용하고 가장 깊게 말하고 싶은 것을 담은 부분이라는 걸, 두 번째 읽으면서야 제대로 느꼈습니다.
테레자가 키우는 개 카레닌의 죽음을 통해 쿤데라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더 나아가 인류의 도덕적 실패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관점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규정하고,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으며 동물의 신음은 단순한 기계 장치의 삐걱거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17세기 철학자입니다. 여기서 데카르트적 자연관이란 인간이 자연과 동물을 지배하고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는 인간중심주의 철학을 의미합니다.
테레자는 이 관점을 거부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힘 있는 존재에게 잘 대해주는 건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선의(善意)는 아무 힘도 없는 존재,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인간의 손에 맡긴 동물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순수해진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대는 바로 동물과의 관계라는 것이 소설의 주장입니다.
이 대목에서 니체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채찍 맞는 말을 보고 말의 목을 껴안으며 울었고, 그 직후부터 정신질환이 발병했습니다. 쿤데라는 니체가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고 표현하며, 그 광기의 시작이 곧 '자연의 주인으로 행진하는 인류'와의 결별이었다고 읽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으로 서양 철학사의 두 거인을 맞대어 놓은 문학을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 장면은 읽고 나서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을 덮고 나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설이 아닙니다. 사비나,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라는 네 인물은 각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다가, 사비나를 제외한 셋이 모두 갑작스러운 사고나 허망한 죽음으로 생을 마칩니다. 쿤데라는 이 결말을 통해 "어떤 삶이 정답"이라는 말을 끝내 하지 않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적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의 태도가 더 명확해집니다. 실존주의란 삶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철학적 입장으로, 사르트르와 카뮈로 대표됩니다. 쿤데라는 실존주의의 언어로 네 인물의 삶을 펼쳐 보이면서, 그 어떤 선택도 비교 불가능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xistentialism).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키치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진짜 제 삶을 살고 있는가. 타인이 만들어준 거창한 명분을 제 것인 양 안고 달리는 건 아닌가. 쿤데라의 질문은 소설 안에서 끝나지 않고, 책을 덮은 독자의 일상으로 조용히 이어집니다. 그게 이 소설이 수십 년이 지나도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론
저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한동안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정말 내 것인가'를 자꾸 되물었습니다. 사회가 만들어준 숭고한 목표, 집단이 요구하는 진지함, 그것이 키치가 아닌지를요. 쿤데라는 그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놓고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게 처음엔 불친절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게 이 소설의 진짜 존중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줄거리보다 인물 한 명을 골라 그 사람의 눈으로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사비나, 토마시, 테레자, 프란츠 중 누구에게 자신이 겹쳐 보이는지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읽힙니다.